Russia Khaba, Kyrgyzstan Biskek
Kyrgyzstan

러시아 하바롭스크한국교육원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 피살

비쉬켁 2015. 3. 1. 09:23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시절 부총리를 지내고, 푸틴 대통령에 저항하는 야권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보리스 넴초프(55) 전 부총리가 27일 저녁 괴한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넴초프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불과 2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피살됐다.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야권 인사다.
지난 2008년 다른 야권 지도자들과 함께 야권 운동 단체 '솔리다르노스티'(연대)를 창설해 이끌어 오면서 푸틴 정권의 권위주의와 부패, 경제 실책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2011년 총선 이후에는 유명 블로거 출신 변호사이자 야권 운동가인 알렉세이 나발니 등과 선거 부정, 푸틴의 장기 집권 시도 등을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최근 들어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과 경제난 등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피
살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그래서 나온다. 그는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이후 등장한 친서방 정권에서 고문을 맡기도 했다. 

외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에 반대하는 야권의 대규모 거리시위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러시아 야권은 "정치적 살인"이라고 강력히 반발하는 등 정국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러시아 내무
부는 넴초프가 이날 저녁 11시 40분께 우크라이나 출신의 24세 여성과 함께 크렘린 인근의 '볼쇼이 모스크보레츠키 모스트' 다리 위를 걷던 중 지나가던 차량에서 가해진 총격을 받고 숨졌다고 발표했다. 괴한들은 흰색 승용차를 타고 넴초프에게로 접근해 6발 이상의 총격을 가했으며 그 중 4발이 넴초프의 등에 맞은 것으로 전해졌다. 

동행한
여성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연방수사위원회는 동행한 우크라이나 여성과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한편, 사건 전후 넴초프의 통화 내용과 그의 이동 경로가 찍힌 CCTV 영상을 확보해 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수사위원회 측은 "국내 정치 혼란 조장을 위한 도발, 사업상 이권 분쟁, 개인적 원한,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소행 등의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넴초프는 사건 당일 크렘린 인근에 있는 반정부 성향의 라디오 방송 '에호 모스크비'에서 인터뷰를 하고 나와 붉은광장 옆의 대형백화점 '굼'에서 우크라이나 여성과 만나 사건 현장인 모스크바강 다리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던 중 총격을 받았다. 

당국은 "현장에 남겨진 총탄을 볼 때 구경 9mm 소련제 마카로프 권총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계획적 범행으로 철저히 준비됐으며 장소 선택도 우연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넴초프 가족의 변호사는 몇 달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넴초프에 대한 살해 협박이 있어 당국에 신고했었지만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통령 공보비서(공보수석)는 "푸틴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청부 살인이자 도발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면서 중대 범죄를 담당하는 연방수사위원회,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 경찰청 등의 수장들이 사건을 직접 챙기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야권 운동가 드미트리 구트코프는 사건 소식이 알려지고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의심할 여지없는 정치 살인"이라면서 "현 정권이 직접 청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권이 선전해온 (야권에 대한) 증오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명에서 이번 사건을 "잔혹한 살인"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아 정부가 신속하고 공정하며 투명한 수사를 벌일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 중부 니제고로드스크주(州) 출신으로 니제고로드스크주(州) 대학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동안 물리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던 넴초프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한 1986년에는 새 원전 건설을 반대하는 환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건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 소련 내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의회 격) 대의원 선거에 출마해 공산당 후보들을 제치고 당선되면서부터다. 의회에서 농업개혁과 무역자유화 등을 위한 입법 활동을 주도했던 그는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던 개혁파 옐친의 눈에 띄었으며 이후 대통령이 된 옐친에 대한 보수 강경파의 공격 저지에 앞장서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 덕에 니제고로드스크주 주지사(1991~97년), 연료·에너지부 장관(1997년), 제1부총리(1997~98년) 등의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광범위한 대중적 인기를 끌던 그는 1990년대 후반 옐친 대통령의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기도 했다. 1998년 금융위기로 자리를 물러난 그는 재기를 위해 '우파세력연합'을 만들었으나, 푸틴 대통령의 등장으로 분당 위기에 빠졌고, 2003년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책임을 지고 당 공동대표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그는 푸틴에 반대하는 여러 야권 단체와 정당 등을 만들어 이끌면서 재야 반정부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바이러시아 자료)

'러시아 하바롭스크한국교육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내 테니스장  (0) 2015.03.04
러시아 발레  (0) 2015.03.02
빠루스 호텔 주변  (0) 2015.02.27
한국에서 하바 오는 방법  (0) 2015.02.25
무라바예브 동상  (0) 201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