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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Op.23

비쉬켁 2019. 10. 31. 20:23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Op.23 >>


Pyotr llyich Tchaikovsky 페데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840~1893)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Op.23] 1악장,2악장,3악장

러시아 국민주의 거장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어느정도 감정이 동요하고 있던 시기와 후기 국민주의적인 시기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할 수있다.

 

국민주의적인 면은 양쪽 끝 악장에 우크라이나의

주제를 다시 쓰고 있는 것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인상적인 서두의

선율은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제1번의 힘찬주제는 이작품 속에서 되풀이되지는

않지만,찬란하고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이협주곡을

효과적으로 시발시키고있다. 또 그것은 최종악장의

주요 주제와 잘조화되고 있으며,그래서 전곡은

당당한 틀을 갖게된다.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에게 헌정되었으나, 루빈시타인은 헌정을 기뻐하기는 커녕몹시 화를

내며 기교면에서 호된혹평을 내렸다.그래서 차이코프스키는 뷜로에게 다시헌정했는데,

뷜로는 이것을 격찬하여 음악 여행동안 각지에서 연주했다.

 

▼차이코프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1악장 동영상


Piano Concerto No. 1 in B-Flat Minor, Op. 23: I.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차이코프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2악장 동영상


Piano Concerto No. 1 in B-Flat Minor, Op. 23: II. Andantino semplice




▼차이코프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3악장 동영상


Piano Concerto No. 1 in B-Flat Minor, Op. 23: III. Allegro con fuoco


▲차이코프스키의 젊은시절

 많은 경험을 쌓아 나가고 있던시절 동성연애자로서 죄악감에

더욱 시달리게된 그는 자기가 위기를 향해가고 있다는것을

 

알자 결혼만이 자기문제의 해결방도인양

다짜고짜로 결혼으로 치닫게된다.

 

그리고 승화된 열정과 비극적인 억압감을 그는 오로지 음악에만

쏟아넣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1863년  23세때 이미 음악가가 되려는 결심을 하고있었다. 1859년에

법률학교를  졸업한후 그는 법무성에 들어가 근무하는 한편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가서 음악공부도 한다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19세기중엽의 유복한 러시아의 가족 작자미상의 이 그림은 당시의 유복한 가정의 모습을 잘 포착하고 있다.

피아노가 자랑스럽게 놓여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와같은 부유층들이 형성하는 시장을

상대로 많은 매력적인 살롱용 소품이나 가곡을 작곡했다.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웅장하고 동시에 자기고백적이기도 하다.

느린악장의 중간부에 있는 빠른왈츠는 아르토양이

부르던 노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어떤 자전적인 메시지가

여기에 숨겨져 있다고할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가 사랑한연인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들

1872년 음악원 건물을 중앙에 두고, 차이코프스키(상,중앙오른쪽)창립자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옆)는 1865년부터 78년까지 화성학의 교수로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최초의 교향곡인 G단조의 작품을 쓰는 일에 착수했다. 그것은 1866년말에

완성되고 또 개정되었다. 이교향곡은 그후 1874년에도 개정되었는데,

이렇게 작품을 재검토하는 것은 다른사람의 비판이나

자신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교향곡은 멘델스존과 슈만의 분위기를 가진 것이기는하나 놀랄만큼 차이코프스키의

개성이 투영되어있다.<겨울날의 환상>이라는 부제는 로맨틱한 기분을 암시하며,

4악장중 3개의 악장에 민족적인 주제를 쓰고 있지만,이때문에 이교향곡의

자전적요소가 손상되고 있지는않다.

 

▲차이코프스키의 다음의 중요한 창작은 그의 최초의 오페라였다. 그는다시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

[지방장관]을 소재로 했다. Op3인 이음악은 1867년 3월부터, 파리를 방문중이었던

1868년의 여름사이에 완성되었다. 이작품은 다음 해2월 볼리쇼이극장에서 상연되었지만,

실패로로 끝났다.

 

1870년~1872년에 걸쳐서 쓴 오페라 <오프리치니크(친위병)>나, 1875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작고한 발레<백조의호수>에 전용하고,원작은 없애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그는 오페라 가수인 데지레 아르토를 사랑하게 되었다가, 또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가,실연의 고배를 마시게된다.

 

▲<크라스노예의 마을잔디의 언덕에서>_레핀의 그림.1876년- 이작품은

<에프게니 오네긴>의 배경이된 한가롭고 전원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