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지난 2, 3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니콜라이 파트루세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 등 고위 인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위드 코로나' 정책과 함께 오는 8일부터 새로운 출입국 제도를 시행하는 미국이 '스푸트니크V' 백신을 번외로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 러시아측과 협의했는지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 CIA국장, 모스크바서 국가안보회의 서기 파트루셰프와 만났다/얀덱스 캡처
나리쉬킨 대외정보국장, 미 CIA국장과 국제테러 문제 논의/얀덱스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번스 국장은 러시아 방문에서 파트루세프 안보회의 서기와는 군비 경쟁과 사이버 범죄 등에 대해, 세르게이 나리쉬킨 대외정보국 국장과는 국제 테러 문제에 대해 집중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CIA 국장의 이번 러시아 방문이 관심을 끈 것은 그가 바이든 미 대통령의 특사급으로 모스크바에 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번스 국장은 주러시아 미국대사(2005년∼2008년)를 지내 러시아내 인맥이 적지 않다. 그가 바이든 미 행정부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고 현안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게 틀림없다.
그의 방러에 대해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 대변인은 2일 "번스 국장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고위급 대표단을 이끌고 있다"며 그의 특별한 자격을 언급한뒤 "양국 관계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러시아 국가안보회의는 이날 번스-파루트셰프 만남을 홈페이지에 실었지만, "두 사람이 양국관계를 논의했다"고 짤막하게 전했다.
번스 CIA국장 파트루셰프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출처: 러시아 안보회의
크렘린의 반응은 달랐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3일 "푸틴 대통령이 흑해 휴양지 소치에 머물고 있어 번스 국장의 예방을 받지 못했다"며 "대통령은 파트루셰프 서기로부터 번스 국장과의 회담 내용을 보고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번스 국장의 이번 방문에서 이뤄진 양국간의 민감한 현안에 관한 고위급 대화는 양국의 관계 진전에 매우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현지 유력지 이즈베스티야는 번스 국장의 방러 기사에서 "파트루셰프 서기는 지난 2013년 번스 당시 국무부 부장관과 만난 적이 있고,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정책 실세인)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 안보보좌관과도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져왔다"며 "설리번 보좌관과는 올해에만 한번 만나고, 6차례나 전화통화를 했다"고 전했다. 해석에 따라서는 양국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소통 창구를 파트루셰프 안보회의 서기(우리 식으로는 청와대 안보실장)가 맡고 있다는 듯한 늬앙스를 풍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계기로 악순환의 사이클로 넘어간 양국 관계를 평상시의 외교적 접촉으로는 풀 수 없기 때문이다.
번스-파트루셰프 협상에 대한 카프루니 교수의 분석을 싣은 현지 매체 렌타(LENTA).ru/ 웹페이지 캡처
'중국 포위'를 노리는 미국의 새 외교 노선도 '대화 채널'의 격상을 부추겼을 수 있다. 1970년대 냉전 시절 구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수교한 '키신저 외교'와 같은 논리로,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킬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미국에게 있다는 분석도 러시아 전문가의 입에서 나온다.
특히 번스 국장의 방문을 앞두고 마리야 자하로프 외무부 대변인이 지난 달 말 이례적으로 "미국과 실용적이고 정상적인 대화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양국간 '물밑접촉'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양국이 고위급 대화를 필요로 할 정도로, 미-러 관계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여전히 냉랭한(냉전) 상태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6월 제네바에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핵무기 군비경쟁, 사이버 안보, 러시아내 인권 문제 등 양국간 현안에 대해 논의했지만, 실무적으로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러 양국이 관계 정상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현안으로는 '랜섬웨어'와 해킹 등과 같은 사이버 범죄와 인권 문제를 들 수 있다. 여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백신의 상호 인정 문제도 최근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지난 6월 제네바에서 만난 푸틴-바이든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사이버 보안' 문제는 양국 정상이 지난 6월 정상회담에서 '실무적 협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번스 국장이 파트루셰프 서기를 만나 이 문제를 깊숙히 논의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미 FBI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유명 사이버 보안업체 '그룹-IB'(Group-IB) CEO인 '일리야 사치코프'의 체포 문제도 다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사치코프 CEO는 지난 9월 말 러시아 정보기관 FSB(KGB 후신)에 의해 '국가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파트루셰프 서기는 FSB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1999년~2008년 FSB 국장 역임)이다.
'반 푸틴'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및 투옥 문제도 양국간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쟁점 중 하나다. 바이든 대통령은 6월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나발니 석방을 촉구했으나, 푸틴 대통령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지난 2017년 러시아를 적대적인 국가로 선언한 뒤 미국식 정치를 추종해 러시아를 장악하려는 (러시아내) 정치 조직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나발니가 주도한 반부패재단 등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다는 반박이다. 푸틴 대통령은 또 외국의 지원을 받는 단체를 '외국 대리인' 으로 지정해 활동을 제한하고, 러시아 국내법을 위반한 나발니의 구금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다.
제네바 미-러 정상회담후 기자회견하는 푸틴 대통령/현지 매체 동영상 캡처
주목되는 것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로 형성될 조짐을 보이는 '백신 냉전'의 극복 방안에 대한 논의 여부다. 미국은 오는 8일부터 백신 접종 외국인들의 자유로운 출입국을 보장하는 새 출입국 제도의 시행에 들어간다. 그러나 미국은 '스푸트니크V' 백신이 세계보건기구(WHO)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했다. 발끈한 러시아 측은 이에 보복할 태세다.
다행히 미하일 무라쉬코 러시아 보건부 장관은 지난달 초 제네바에서 미국 대표단과 만나 양국의 백신을 상호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고 밝혔다. 그 협의 내용을 바탕으로 양측이 '백신 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밀당'이 기대되고 있다.
양국의 비자 발급 문제는 현재 최악의 상태다. 러시아는 미국의 대응에 맞서 지난 5월 미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한 뒤 러시아 내 미국 공관의 러시아 직원 채용을 금지했다. 미 국무부는 어쩔 수 없이 주 모스크바 대사관을 제외하고 러시아내 모든 외교 공관의 문을 닫았다. 주 상트페테르부르크 미 총영사관은 지난 2018년, 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은 지난해 12월, 주 예카테린부르크 총영사관도 지난 5월 업무를 중단했다.
미 국무부는 최근 러시아를 비자 업무 처리가 어려운 국가인 '집 없는 국가'(Homeless Nationalities) 목록에 추가했다. 러시아인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미국 공관에서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양국이 고위급 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서로가 불편한 처지에 빠져 있다. 번스 국장과 파트루셰프 서기의 회담이 주목을 받는 가장 큰 이유다.
바이러시아 2021-11-07 04:54:48더보기
미 CNN은 6일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모스크바 방문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서 러시아군 증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러시아 측에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소식통을 인용, "그가 바이든 미 대통령을 대신해 러시아를 방문했다"며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이 방문의 주목적이라고 전했다.
번스 국장은 모스크바 방문 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긴장 완화를 위해 서로 노력할 것을 요청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번스 국장의 이같은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미 국무부 관리가 4일 키예프를 방문했다고도 했다.
이 방송은 또 러시아가 올 겨울 에너지 위기에 직면한 우크라이나와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 문제를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대해서도 경고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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