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 Khaba, Kyrgyzstan Biskek
Kyrgyzstan

에따 러시아

그때 러시아에서는- 요란하고 별난 그 곳 새해맞이 풍경

비쉬켁 2022. 1. 2. 20:33

2022년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되돌아보면, 러시아의 새해 맞이는 좀 요란스럽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그러다 보니 사건사고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소련 시절과 달리 40도의 독주 '보드카'가 거리에 넘쳐나던 1990년대 후반, 러시아 정부와 모스크바시는 연말연시를 앞두고 국민(시민)에게 늘 잊지않고 당부한 말이 있었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술마시고 밖으로 나가지 말아달라".

그러나 통상 10일 가까이 계속되는 새해 연휴를 보내고 나면 바뀌는 게 별로 없었다. 새해 첫날부터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병원으로 옮겨진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었고, 늦게 발견되는 바람에 동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 포스터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련영화 1위에 오른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포스터

 


그 시절의 '새해 맞이' 세태는 소련 인기 TV 드라마(1, 2부작) ‘운명의 아이러니, 아니면 사우나 잘 하세요!’ (Ирония судьбы, или С лёгким паром!)에서 엿볼 수 있다. 1976년 새해 첫날(1월 1일) 첫 방영된 이 드라마는 아직도 매년 12월 31일 안방을 찾는다고 하니, 그 긴 생명줄이 놀랍다. 러시아(소련)의 요란한 새해맞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웃고 보는 재미도 있으니 그럴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발표된 여론조사(조사기관:브찌옴·ВЦИОМ)에 따르면 '운명의 아이러니'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련시절의 영화 7위에 꼽혔다. 1위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Москва слезам не верит)다.

영화로도 개봉된 ‘운명의 아이러니’는 1970년대 소련의 주거 문화를 풍자하는 짤막한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다. 스탈린에 이어 권력을 잡은 니키타 흐루시초프(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흐루쇼프'라고 쓰는 게 맞다. 공산당 제1서기 재임 기간은 1953∼1964년)가 당시 고질적인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건설한 서민 아파트, 즉 ‘흐루쇼프카' (хрущевка)가 영화의 밑그림이다.

'흐루쇼프카'는 5층짜리 콘크리트 조립식 건물이다. 뚝딱뚝딱 지을 수 있으니 당시에는 심각한 주택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똑같은 구조로 급하게 짓다 보니, '집 찾기가 힘들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 우스개 소리가 이 드라마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술에 취한 드라마 주인공이 모스크바의 '자기 집'과 똑같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남의 집'으로 잘못 들어가면서 '운명이 바뀌는' 코믹한 멜로드라마다.




드라마 ‘운명의 아이러니’ 시작 애니메이션 부분. 똑같이 생긴 ‘흐루쇼프카’ 아파트들이 줄 맞춰 행진하고(위), 각기 특색있는 아파트 건축 설계도가 허가 부처의 도장들을 받는 과정에서 획일적인 사각형 아파트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유튜브 캡처

 


외과 의사인 주인공 제냐는 여자친구 갈랴를 집으로 불러 함께 새해를 맞을 계획이다. 시간이 남은 제냐는 친구들과 러시아식 사우나 '바냐'에 가 먹고 마시기 시작한다. '바냐'는 우리의 사우나와는 완전히 다르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찜질방'과 유사하다. 일행과 떠들면서 음식과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운명은 '바냐'에서 완전히 술에 취한 제냐가 레닌그라드행 비행기를 타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공항에 내렸으나 여전히 술에 취한 제냐는 택시 기사에게 모스크바의 아파트 주소를 불러준다. '흐루시쇼카' 주거문화 덕분에 레닌그라드에도 같은 주소에 같은 5층짜리 집(아파트)이 있었다. 제냐는 문의 열쇠구멍까지도 똑같은 '남의 집' 안으로 들어가 침대위에 쓰려졌다. 그 후 이 집의 진짜 주인인 나쟈가 들어오고.. 영화는 엎치락뒤치락 코믹 멜로드라마의 정석대로 흘러간다.


'바냐'에서 친구들과 먹고 마시는 주인공 제냐


술에 취해 탄 레닌그라드행 비행기안에서 옆 승객에게 민폐를 끼치는 장면/유튜브 캡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함께 새해를 맞기로 한 여친 갈랴와 헤어지고, 남의 집 주인 나쟈의 남친마저 제끼고, 사랑을 쟁취하는 해피앤딩이다. 아무리 '운명의 아이러니'이라지만, 그 뒷맛을 개운하지 않다.

개인적인 1990년대 새해맞이 기억은 모스크바 외곽의 사나토리(Санаторий, 우리의 리조트)에서 겪은 '빙판길 고생 체험'에 꽂혀 있다. 모스크바의 몇 가족과 함께 러시아식 새해맞이를 체험하기 위해 찾아간 사나토리는, 우리 수준에서는 볼품이 없었다. 낡은 시설에 불편한 소련식 서비스가 여전했다. 그래도 러시아 사람들과 함께 보드카 잔을 부딪히며 서로 덕담을 주고 받았고, '카운트 다운'을 함께 하며 새해 첫날을 맞았다. TV로 옐친 대통령의 새해 인사를 지켜봤다.

드라마 '운명의 아니러니' 속 주인공처럼 술에 취해 완전히 뻗지 않는다면, 이게 러시아 보통 사람들의 새해 맞이다. 올해도 '신종 코로나(COVID 19)' 팬데믹(대유행)만 아니었다면, 현대화된 모스크바 외곽의 사나토리 풍경도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크렘린을 배경으로 대통령이 국민에게 새해 희망을 던지는 메시지도 변함이 없을 터다.


2022년 1월 1일 0시 새해 인사를 전하는 푸틴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그러나 2022년은 러시아에게 1990년대 못지 않는 '격동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푸틴 대통령도 국민들에게 해야 할 말이 많은지, 새해 인사가 6분 22초(약 700단어)로 가장 길었다고 한다. 그는 이례적으로 신종 코로나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코로나와 서방의 안보 위협과 같은) 거대한 도전을 잘 이겨냈다"고 자평하면서 "확고하고 일관되게 국가 이익과 국가 및 국민의 안보를 수호하고, 또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러시아는 그만큼 위중한 시기를 보내고, 또 맞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