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난 3일로 100일을 맞았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테이블이 몇차례 차려졌지만, 느닷없이 불거진 '부차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협상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 주도의 대우크라 중화기 제공과 대러 제재 강화, 이에 맞선 러시아 측의 보복 조치들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전쟁은 장기화로 치닫을 조짐이다.
러시아 언론 보도를 기준으로, 전쟁 100일을 전후해 양측에서 확연히 달라진 건 대충 두가지다. 우크라이나에선 조만간 반격이 가능하다는 자신에 찬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러시아에선 특수 군사작전의 전술및 세부 공격 작전 변경에다 장기전 전망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협상을 통한 조기 종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군의 대대적인 반격설은 대통령실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올렉시 아레스토비치 대통령 고문은 3일 독일 공영 국제 방송인 '도이치벨레'와의 인터뷰에서 "서방 측의 무기가 충분히 도착하면 우리도 반격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7, 8월에는 최소한 4~5개 여단을 구성해 러시아에 대한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아레스토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사진출처:페북
러시아와의 협상팀을 이끈 미하일로 포돌랴크 고문도 "전선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을 때까지 모스크바와 협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서방측으로부터) 충분한 무기를 확보할 때까지, 우리의 입장을 강화(반격)할 때까지, 가능한 한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멀리 밀어낼 때까지, 협상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태도 변화는 일찌감치 예견된 바 있다. 러시아 대통령 산하 '민족문제위원회' 위원이자 정치학자인 보그단 베즈팔코는 지난 5월 초 현지 유력지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군에게 서방 측의 첨단무기들이 제공되면, 반격이 시작될 것"이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으로 반입되는 서방측 무기 수송을 막지 못하면, 7월에는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후 비슷한 전망들이 현장 종군기자들의 텔레그램 보도(우리식으로는 유튜버)로 나오곤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100일간 러시아의 공격에 나름대로 잘 버티면서 젤렌스키 대통령 중심으로 반격에 대한 자신감을 찾은 것으로 해석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공격) 작전 변경:왜 병력 손실이 줄었나/얀덱스 캡처
러시아에서는 전직 장성급 정치인 그룹에서 '장기전' 전망이 본격적으로 나오고 있다. 안드레이 카르타폴로프 국가두마(하원)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3일 "러시아군이 현장의 공격 작전 개념을 바꾼 뒤 병력 손실이 크게 줄어들었다"며 "현장에서는 다양한 현장 상황 혹은 상대에 따라 전투 매뉴얼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사 작전 초기의 판단 착오와 어설픈 대응을 현실에 맞게 수정했다는 것인데, 덩달아 손실도 크게 줄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카르타폴로프 위원장은 러시아의 시리아 공습 작전 당시, 시리아 제 2의 도시 '팔미라' 탈환(2017년)을 직접 지휘한 현지 사령관 출신이다.
종군기자들도 러시아군이 더이상 '닥공'(닥치고 공격)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집요한 포격 후 진격하는 방식으로 공격 작전을 바꿨다고 전한다. 무차별 공습을 가한 뒤 지상군을 투입한 미군 주도의 '이라크 전쟁'(2003년)을 연상케하는 대목이다.
이같은 지상 작전의 변경은 불가피하게 진격 속도를 늦출 수 밖에 없다. 악명 높은 '체젠 전사'를 이끄는 람잔 카디로프 체첸자치공 대통령은 3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을 만나 전면전과 속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러시아 공수부대 사령관 출신으로 국가두마 의원인 블라디미르 샤마노프 대장은 1일 "우크라이나로 진입하면 (주민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던 게 이번 특수 군사작전의 가장 큰 실수였다"며 "이후 현실을 깨닫고 군사작전 고유의 전술로 돌아갔으나,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에는 5~10년이 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개전 100일 지난 현재,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과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아조프해 연안 지역 공략에 집중하고 있다. 러시아 본토에서 우크라이나 남부를 거쳐 크림반도까지 이어지는 육로 회랑을 확보하는 게 당면 목표로 보인다. 이를 위해 러시아 측(러시아군과 DPR, LPR 연합군)은 우크라이나 최정예군이 지난 2014년 이후 주둔한 세베로도네츠크-리시찬스크 전선, 이쥼(하르코프주, 즉 하리키우주)-슬라뱐스크 라인, 크라마토르스크-바흐무트 라인의 공략에 나선 상태다. 이 곳을 확보하면 돈바스 지역을 위협하는 우크라이나 주력군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2C7M '말카' 자주포/사진출처:러시아 국방부 영상 캡처
동시에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을 물론, 남부 헤르손주(州)와 자포로제주에서 러시아 루블화를 법정화폐로 도입하고,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이 발급하는 등 '러시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러시아 이동통신과 은행, 방송, 슈퍼마켓 체인 등도 이곳 주민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다.
우크라이나가 믿는 구석은 역시 전쟁의 판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미국 첨단 무기들의 조기 수령이다. 특히 그동안 집요하게 제공을 요구했던 사거리 64㎞ 이상의 다연장 로켓 시스템(GMLRS)에 대한 기대가 크다. 고속기동 로켓 시스템(하이마스, HIMARS)에 탑재해 전선을 휘저으며 러시아군을 격퇴 혹은 반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의 우크라이나 배치는 앞으로 3주 가량 걸릴 것(미 국방부 발표)으로 예상된다. 러시아군은 이를 직접 파괴하거나, 철도 운송을 막는다는 방침이어서 양측의 신경전도 치열하다.
어차피 전쟁은 상대에 대한 '파괴' 과정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개전 100일이 지나도록 서로 물러나지 않을 방침인 만큼 양측의 '치킨 게임'은 상당 기간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 우크라이나 두줄 뉴스 - 4일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2일 자포로제 지역 최전선에서 군 시신 160구를 상호 교환했다.
- 우크라이나전에 참가한 4명의 외국 용병이 사망했다고 우크라이나측이 밝혔다. 네덜란드 출신의 Ronald Vogelaara, 호주 출신 Michael O'Neill, Bjorn Benjamin Clavis, Wilfried Blery이다.
불타는 스뱌토-우스펜스키 스뱌토고르스크 수도원/텔레그램 영상 캡처
-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의 스뱌토고르스크에서 퇴각하는 우크라이나군이 정교회 성지인 '스뱌토-우스펜스키 스뱌토고르스크 수도원'(Свято-Успенская Святогорская Лавра)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불태웠다고 러시아 국방부가 주장했다. 그러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이 수도원이 파괴됐다"며 "60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약 약 300명의 신도들이 수도원으로 대피해 있었다"고 반박했다. 불에 탄 이 건축물은 16~17세기의 러시아 목조 건축 형식으로 2009년 지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군은 아직 스뱌토고르스크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파벨 야블론스키 폴란드 외무차관은 유럽연합(EU)이 7번째 반러시아 제재 패키지 작업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새 제재안에는 러시아 가스의 EU 공급 및 대금 결제에 영향을 미치는 '가스프롬방크'(러시아측이 요구한 가스 대금의 루블화 결제 납부 은행)의 SWIFT 제외 등이 들어있다고 그는 말했다.
- 나토(NATO)는 5일부터 17일까지 발트해 지역에서 합동 군사훈련 'Baltops 22'를 진행한다. 14개 회원국은 물론, 나토 가입을 신청한 스웨덴과 핀란드도 참가한다.
- 패스트푸드 체인 KFC가 독일에서 우크라이나 관련 옥외 광고를 시작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창업자인 '샌더스'가 담요를 걷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을 담은 이 광고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치킨이 독일에서 매우 환영받는다'고 쓰여 있다. 현지 언론은 이 광고를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KFC 옥외광고/사진출처:텔레그램 @Sputnik Near Abroad
- 러시아군이 장악한 DPR 지역에서 러시아의 '프롬스뱌지방크'가 공식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 은행은 주민들에게 계좌를 개설하고, '미르 카드'도 발급한다. 이 은행의 영업은 우크라이나 은행들이 헤르손 주민들의 계정을 차단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군 진주와 함께 문을 닫은 우크라이나계 은행들은 지역 주민들의 카드 사용과 현금 인출 등을 막았다.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부터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 푸틴 대통령과 약 100시간 통화했다"며 "러시아에게 굴욕을 안겨줘서는 안된다. 특수 군사작전이 끝나면 외교를 통해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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