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의 '천재 소녀' 카밀라 발리예바의 도핑 논란은 20일 폐막한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의 최대 이슈였다. 징계가 확정되지 않는 한, 법률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발리예바는 아직 '도핑 선수'가 아니다. 스포츠중재재판소(CAS)의 결정에 따라 그녀는 올림픽 싱글 매치(경기)에 출전했고, 앞으로도 국제대회 출전이 가능하다. 당장 내달(3월) 21일~27일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열리는 국제빙상연맹(ISU)의 2022년 세계선수권 대회 출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녀의 도핑 파문이 남긴 상처도 적지 않다. 발리예바가 여자 싱글 매치에서 메달권에서 멀어지는(4위) 바람에 언니들(금메달 안나 셰르바코바, 은메달 알렉산드라 트루소바)은 메달을 목에 걸고 러시아로 돌아가지만, 단체전 시상식은 끝내 무산됐다. 2위에 오른 미국 측이 CAS에 도핑 파문에 따른 시상식 연기가 부당하다고 제소했지만, 기각됐다. 아무런 메달도 목에 걸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미국과 일본 선수들이 받아야 하는 마음의 상처는 심각하다.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을 확보한 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안나 셰르바코바/사진출처:ROC 텔레그램 계정
금메달을 목에 건 안나 셰르바코바/사진출처:ROC 텔레그램 계정
선수들의 도핑을 적발하는 세계반도핑기구(WADA)와 (스포츠 관련 단체들의 합의에 의해) 도핑 분쟁에 관한 심판권을 부여받은 CAS 간에도 불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마치 기소권을 지닌 검찰이 재판부의 (무죄) 판결에 불쾌함을 드러낸 것 같아 씁쓸하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WADA는 여자 싱글 매치가 끝난 뒤인 18일 성명을 내고 "CAS의 발리예바 출전 금지 해제 결정이 WADA의 도핑 방지 코드(규정)을 무시한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반도핑 규정의 기본 원칙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반박성 주장이다.
WADA 성명은 또 (도핑) 해당 선수가 '보호 대상자'라는 이유로 반도핑의 원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CAS를 공격했다. 나아가 도핑 양성 판정을 받은 '보호 대상자'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규정의 예외를 인정하면, 스포츠의 공정한 경쟁 원칙을 무너뜨리고, 공정하게 경쟁하고 있는 다른 선수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WADA:CAS가 발리예바의 출전금지를 해제함으로써 반도핑 코드(규정)을 무시했다/얀덱스 캡처
CAS가 공개한 결정문
이에 대해 CAS는 발리예바의 출전을 허용한 결정(판결)문 전체를 즉각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등 반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발리예바가 그토록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왜 싱글 매치에 출전해야 하는지 읽어보고 판단하라는 듯하다.
발리예바 비판에 앞장선 미국반도핑기구(USADA)가 캐나다와 함께 CAS 청문회에 '옵저버 방청권'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한 사실도 판결문에 명시돼 있다. 트래비스 타이거트 USADA 위원장이 청문회 진행 상황 등 모든 것을 잘 아는 것처럼 미국 언론에 떠든 내용도 사실은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했다는 반박이다. 도핑 광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지금, CAS의 판결문을 꼼꼼히 검토해볼 만한 이유이기도 하다.
앞서 타이거트 위원장은 CNN과 인터뷰에서 "발리예바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경기력 향상을 위해 금지된 약물 1종과 금지되지 않은 약물 2종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판결문을 보면, 발리예바 측은 "특정 약물들을 복용했지만, 트리메타지딘은 그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타이거트 위원장은 또 "발리예바의 소변 샘플에서 검출된 트리메타지딘의 농도는 1mL당 2.1ng(나노그램)으로 분석됐다"며 "이는 샘플 오염으로 판명받은 다른 선수의 샘플과 비교하면 약 200배 가량 많은 양"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문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그 정도 미량의 검출 양은 샘플 오염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특히 2.1ng/ml는 도핑 검사의 기술적 오차 범위(10ng/ml)내에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했다. 오차 범위안의 양성 반응은 샘플 B를 개봉할 경우, 결과가 뒤집혀질 수도 있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졌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카스 본부/사진출처:위키피디아
CAS 재판관 3명은 7시간 가까운 청문회(심의) 끝에 △ 올림픽과 같은 큰 대회를 앞두고 도핑검사 결과 통보가 너무 늦었고 △ 발리예바를 돌보는 할아버지 심장약(트리메타지딘)에 의해 샘플이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 미량(2.1ng/ml)의 트리메타지딘 검출량이 갖는 과학적 의미를 분석한 뒤 △ 2019년 8월 24일부터 2월 7일까지 받은 여러 차례 도핑 검사에서 지난해 12월을 제외하고는 모두 음성이 나왔다는 점 등을 근거로 발리예바의 싱글 매치 출전을 허용했다. 정확히 말하면, 발리예바에 대한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의 출전금지 해제 결정을 인정한 것이다.
CAS 결정문에 따르면 스톡홀름 WADA 실험실은 발리예바의 샘플(2021년 12월 25일 채취)을 지난해 12월 29일 러시아 측으로부터 전달받고 2.1ng/ml의 트리메타지딘이 발견됐다는 검사 결과를 2월 7일 통보했다. 통보가 늦어진 것은 신종 코로나(COVID 19)에 의한 인력부족이라고 스톡홀름 실험실 측은 주장했지만, CAS 재판관들은 소위 '올림픽'을 앞두고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청문회에서 발리예바 측은 특정 약물을 복용했지만 트리메타지딘은 그 중 하나가 아니라면서 "그녀를 훈련장에 데려가고 함께 식사하는 할아버지가 복용하는 심장약(트리메타지딘)에서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심장 수술 후 트리메타지딘을 복용하고 있으며, 청문회 도중 화상 연결을 통해 할아버지가 직접 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쇼트프로그램이 끝난 뒤 눈물을 흘리며 나오는 발리예바. 위로하는 투트베리제 코치/유로스포츠 캡처
가까운 사람에 의한 샘플 오염 가능성에 대해서는 폴란드 스포츠 의학센터의 논문이 과학적 근거로 제시됐다. 이 논문에 따르면 트리메타지딘 35mg을 한 번(한 알) 복용할 경우, 하루 뒤 검사에서 966ng/ml~9000ng/ml의 양성 반응(검출량)이 나오는데, 2ng/ml의 검출량이 나오려면 검사 5~7일 전에 35mg를 한번 복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수가 대회 5~7일 앞두고 금지 약물을 의도적으로(?) 복용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 2ng/ml의 검출량은 기술적 한계(오차 범위)인 10ng/mL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도 인정됐다. 오차범위 안에 있다는 것은 검사에서 기술적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B'샘플을 다시 검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졌다. 2019년 8월 24일부터 2022년 2월 7일까지 반복적으로 시행된 도핑 검사에서 문제의 샘플(2021년 12월 25일 채취)만 제외하고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도 과학적 근거의 하나로 작용했다.
타이거트 위원장이 "2ng/ml의 검출량은 트리메타지딘을 매일 정량으로 복용해야 나올 수 있는 수치"라며 "할아버지와 물컵을 나눠 썼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과학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CAS 재판관들은 이같은 입증 사실들을 근거로 "(금메달이 유력한) 발리예바의 출전 금지는 자칫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줄 것"이라며 출전 금지를 해제한 러시아측(RUSADA)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발리예바는 프리스케이팅에서 사상 최악의 경기력을 보이며 메달권에서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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